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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역사속인물 신광수

신광수

申光洙 조선(숙종38-영조51) 문인

효성은 지극하였으나 오랜 관직생활에도 노모(老母)를 모실 집이 없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받았던 청렴한 선비이자 서화, 특히 과시(科詩)에 능했고 그 중 《관산융마(關山戎馬)》는 대표작으로 널리 애송되었으며 문집에 《석북집(石北集)》을 남긴 조선시대의 문인

출사 및 관직

1712(숙종 38)∼1775(영조 51). 조선 영조 때의 문인.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또는 오악산인(五嶽山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澔)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郎) 이휘(李徽)의 딸이다. 집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쓰며, 채제공(蔡濟恭)ㆍ이헌경(李獻慶)ㆍ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다.

또한,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39세 때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49세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40여일 머무르는 동안 <탐라록 耽羅錄>을 지었다.

그뒤 선공봉사(繕工奉事)ㆍ돈녕주부(敦寧主簿)ㆍ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772년 61세 때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고, 영조의 대우가 대단하였다. 이때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뒤 우승지ㆍ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명이 세상에 떨쳤는데 특히 과시(科詩)에 능하였고, <등악양루탄관산융마 登岳陽樓歎關山戎馬>(關山戎馬로 약칭됨.)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농촌의 피폐상,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로 택하였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 關西樂府>가 유명하다.

그의 시에 대하여 교우의 한 사람이었던 채제공은 평하기를,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동방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당시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어, 한문학사상 의의가 매우 크다.

저서로 《석북집》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 1책이 전한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 石北集, 韓國漢文學史(李家源, 民衆書館, 1961)
  • 石北詩硏究(尹敬洙, 正法文化社, 1984)
  • 石北文學硏究(李家源, 東方學志 4, 1958)
  • 石北詩集解說(申石艸, 石北詩集, 大洋書籍, 1973)
  • 崇文聯芳集解說(李家源, 崇文聯芳集, 韓國漢文學硏究會, 1975). <李信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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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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