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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역사속인물 이산보

이산보

李山甫 조선(중종34-선조27) 문신

1592년 임진왜란 때 대사간 ㆍ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명나라 원군(援軍)이 당도하였으나 군량이 떨어지자 왕명으로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어 삼남(三南)지방에 내려가 군량을 수집하여 위기를 면하게 하였고 1594년 대기근을 수습하던 중 과로로 순직한 조선시대 문신

출사 및 관직

1539(중종 3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증영의정 색(穡)의 7대손이며, 지무(之茂)의 아들이다. 작은아버지인 지함(之#함15)을 사사하였다.

1567년(명종 22)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갔다가 전적ㆍ해미현감ㆍ정언 등을 지냈으며, 왕명을 받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北道)를 순찰하고 돌아와 수찬ㆍ교리ㆍ지평ㆍ헌납ㆍ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양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천에 돌아갔다가 다시 사인ㆍ집의ㆍ사간ㆍ응교ㆍ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당론을 끝까지 진술하다가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종부시정에 좌천되었다.

1년 뒤 다시 집의로 전임하였고, 이어 동부승지ㆍ대사간ㆍ우승지를 지냈다.

1585년 부제학 김우옹(金宇#옹19)이 이이(李珥)ㆍ정철(鄭澈)이 행한 일을 논박하는 것을 반박하자, 선조는 그의 충절을 크게 칭찬하여 대사헌으로 특진시켰다. 뒤에 이이ㆍ박순(朴淳)ㆍ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경상도와 황해도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9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당하자 이에 연루, 곧 파직되어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하였고, 대사간ㆍ이조참판ㆍ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그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설득하여 명군을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북도와 삼남지방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나갔는데, 지난날의 선정에 감복하여 도민들이 적극 협조함으로써 무사히 해결하였다.

1594년에 대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여 이해득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시정에는 심신으로 다하였다.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충간(忠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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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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